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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21. 21世 〉24. <부정공>귀은공휘용구묘갈명(龜隱公諱龍九墓碣銘)
1. 문헌 목록 〉21. 21世 〉26. <부정공>백강공휘경한행장(白岡公諱擎韓行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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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부정공>매하공휘승현행장략(梅下公諱承鉉行狀略)
梅下公諱承鉉行狀略 公諱昇鉉字應元梅下其自號趙氏系出玉川即今淳昌郡也通德郎諱一溥秉德翊烈廷彬即統制公後四世而公高曾祖禰也妣海州吳氏通德郎寅元女凡四昆季公居二其生是 景陵丙申十月十三日自幼愛敬父母出外得味必懷得獻人皆異之家寠甚而嗜讀書畫宵不輟又知記誦文詞之外自有名敎必以六行四禮爲踐履之方及長府庫充實筆翰遒健功令之文亦富麗而未嘗以闕節痛于當路八漢師如趙尚書寧夏李參判重七兩公以先戚世好見公氣介風節尤器重焉有綜物斷事之量故民邑事有疑難守土諸公必詢公而裁決鄉邦甚倚重焉平日其所事者惟大夫之賢所與者惟士之仁耳勉菴崔先生曾以溫溫恭人獎許淵齋宋先生一見稱以偉人戊戌春相好亭之讀法庚子秋茅川院之講禮無不與之周旋焉公身榦頎長骨秀而肌塋性又沉朗醇雅不以耳目隱發有疾言遽色事親也愉惋備至甘至之供極力營辦時新之物未進則不先口六旬之年連遭巨創執制一遵古禮不以衰老或懈友于兄弟非在外幹事之時則團聚一室怡怡和樂一生如一日每遠近出入先至宗家拜謁家廟徊徨久之若怙恃在堂者然平居必早起整衣冠堂宇室庭掃灑涓潔至于簟席無一點塵埃敬對方册有會心處輒欣然忘味敎子姪以小學家禮爲立心修己之準則非法之言不出諸口非禮之聲色不掃於耳目皆以身故人易從之曉喻坊人勉以興學之規聞風興起自衆其設施規模皆此類也掃人忠恕溫謹俱懽心而不正者不敢以非義干之於財利澹如也與物無競家無長物惟佐圖右史而己晚年痛邦國之喪亂抛棄外事杜門守志大明紅一本植于庭日哦其間自扁以梅下 高宗壬寅五月二十九日終于寝享年六十七葬于順天松光面中大谷右麓甲坐原配平澤林氏通德郎通봡基女無育配礪山宋氏鎭泰女擧二男二女男淵舜淵成張性鉉李貞燮二女婿也淵舜三男長東植次東俊出系淵鈺次東軫出系淵成三女適柳泰永李敎敬張慶鎭淵成一女適申泰柱内外曾孫幼不錄嗚呼公天禀既高德性淳厚充養有素意想超然屈於命未展其所蘊是爲慨惜然其生也一鄉尊之其死也一鄉哀之其爲一鄉善士則足矣豈以用舍爲公重輕也哉公歿二十年冡孫東植懼日遠日忘述其志行之大槩以屬永儀而叙次以人徵言輕辭不獲命謹就其狀草略檃括以竢立言君子裁擇焉 光山 金永儀 謹狀 매하공휘승현행장략(梅下公諱承鉉行狀略) 공의 휘는 昇鉉, 字는 應元이요, 梅下는 그의 호이다. 趙氏는 玉川이 貫인데 오늘날의 淳昌郡이다. 通德郎 一溥·秉德·翊烈·廷彬은 곧 統制公후 四세로서 공의 고조·증조·조·부이다. 妣는 海州吳氏 通德郎 寅元의 딸로 四형제를 두었는데 공이 그 둘째로 憲宗丙申(一八三六)년 十월 十三일에 태어났다. 공은 어려서 부터 부모를 愛敬하여 밖에 나가 맛있는 음식을 얻으면 품안에 넣고 돌아와 부모에게 드리곤 하니 남들이 기특하게 여겼다. 집이 가난했지만 글읽기를 좋아하여 밤낮으로 쉬지 않았으며, 또 記誦文詞, 그 밖에 名敎있음을 알아 이 六行四禮로 實踐해갈 방법을 삼았다. 長成해감에 따라 학식이 충실하고 筆力이 健壯하였으며 과거공부 또한 열심히 했지만 權門勢家를 통하여 벼슬길에 오르려 하지 않았다. 漢陽에서 尙書 趙寧夏·參判 李重七 두사람이 공의 선세와 인척관계가 있다하여 공을 불렀다가 그가 氣介風節이 있는 것을 보고 더욱 그 그릇을 중하게 여겼다. 공은 또 사물에 대해 종합, 결단하는 기량을 가지고 있어 고을에 어떤 해결하기 어려운 일이 있으면 고을 수령이 반드시 공을 찾아와 물은 뒤에 일을 해결하곤 했으니 온 고을이 공을 소중히 여겼다. 공이 평소에 섬겨은 것은 大夫의 훌륭한 점이었고, 더불은 것은 선비들의 어진 면이었다. 勉菴 崔先生은 그를 보고 「溫溫恭人」이라 말하였고 淵齋 宋先生은 그를 위대한 인물이라 하였다. 戊戌년 봄, 相好亭의 讀法과 庚子년 가을 茅川院의 講禮를 모두 공이 주선하였다. 공은 또 신체가 장대하고 골격이 준수하였으며, 성격이 명랑하고 순박하여 귀와 눈으로 은근히 표현하거나 빠른 말과 빛을 보이지 않았다. 어버이를 섬길때는, 기뻐하는 마음과 걱정스런 마음으로 맛있는 음식 봉양하기에 힘을 다하고 계절에 따라 새로운 물건이 나면 자기먼저 먹지 않았다. 나이 六十세에 부모상을 연거퍼 당했으나 한결같이 옛 禮制를 따라하여 老衰함으로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형제간에 우애하여 밖에 무슨 일을 주관할 때가 아니면 항상 한집에 모여 이이화락(怡怡和樂)하게 한평생을 보냈다. 외부 출입을 할 때는 먼저 종가에 가 가묘에 배알하고 오랫동안 서성기리기를 부모가 생전에 계실 때처럼 하였고, 아침이면 일찍 일어나 衣冠을 정돈하고 집이며 뜰을 깨끗이 청소하여 방자리 까지 티끌 한 점이 없게 하였고 공경히 책을 대하고 앉아 마음과 통하는 곳이 있으면 문득 기뻐하여 음식 맛까지 잃었다. 子姪에게는 小學, 家禮로 뜻을 세우고 몸을 닦게하는 방법을 가르쳐 예법에 맞지않는 말은 하지 못하게 하고 예에 맞지않는 행동은 이목에 接하지 못하게 하여 몸소 실천하며 가르치니 모두 그를 쉽게 따랐고 주변 사람을 開喻할 때는 학문을 주로하는 법도로 힘쓰게 하니 그의 가르침을 듣고 일어난 사람이 많았으며, 그가 남에게 베풀어준 規模가 대부분 이러했다. 남들 대할때 忠恕·溫謹하여 다같이 환심을 얻으니 부정한 사람이 감히 非義를 가지고 덤비지 못했다. 財利에도 욕심이 없어 물건을 가지고 다투지 않으니 집에는 귀중한 물건이 없고, 오직 좌우에 책들만 있을 뿐이다. 晚年에는 나라망한 아픔으로 세상 일을 다버리고 돌아와 문을 닫고 뜻을 지키며 매화 한그루를 뜰앞에다 심어놓고 날로 그 아래에서 읊조리며 스스로 梅下라 號하더니 高宗壬寅(一九○二) 五월 二十九일 六十七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묘는 順天 松光面 中大谷 오른쪽 산줄기 甲坐에 있고, 부인 平澤林氏 通德郎 봡基의 딸은 자녀가 없고, 礪山宋氏 鎭泰의 딸은 二남二녀를 두었는데 남은 淵舜·淵成이고, 張性鉉·李貞燮은 두 사위다. 淵舜은 三남을 두었는데, 장남은 東植, 다음은 東俊인데 淵鈺에게 양자가고, 다음 東軫은 淵成에게 양자갔다. 그리고 세 딸은 柳泰永·李敎敬·張慶鎭에게 출가하고, 淵成의 한 딸은 申泰柱에게 출가했으며 나머지는 어려서 쓰지 않는다. 아! 공의 천품이 고결하고 덕성이 순후하며 充養이 원래부터 있고, 意想이 超然했으나 命에 얽매여 그의 포부를 세상에 펴보지 못한것이 한스럽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태어나서는 온 고을이 존경하고 죽어서는 온 고을이 슬퍼 했으니, 한 고을의 善士만 되어도 족한데 쓰이고, 쓰이지 못한 것으로 공을 위하여 輕重을 삼을게 있겠는가. 공이 세상을 뜬지 二十년이 지난 지금 그의 손자 東植이 날이가면 갈수록 잊혀져가는 것을 두려워 하여 고의 志行을 대강 엮어가지고 나에게 와서 서차(叙次)를 청한다. 내가 사람됨이 미약하고 말이 경박하여 사양하다가 하는 수 없이 사가 그 狀草를 살펴보고 대강 바로 잡았으니 立言君子의 선택이 있기를 바란다. 光山 金永儀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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